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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을 찾아서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가평군협의회 교육홍보분과위원 김창균
김창균  |  gpjn20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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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09  22: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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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레임 속에 출발, 그리고 장춘(長春)도착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글을 익히기 시작할 때부터 듣고 노래하는 애국가의 첫 소절이지만, 아직도 단어조차도 신비한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가보지 못한 국민이 적지 않다.

필자 자신도 30여년전 백두산을 다녀온 유명인사의 강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감명 깊게 경청하면서, “나는 언제나 백두산을 가볼 수 있을까?, 그런 기회가 나에게도 찾아와 줄 것인가?” 하는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평소 잘 아는 지인으로부터 백두산 탐방을 권유받고 혼쾌히 동의함으로써, 그토록 고대하던 백두산탐방이 현실화되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에 돌입하였다.

차제에, 백두산 뿐 아니라 광활한 중국땅의 일부라도 밟아보는 기회도 되겠거니와,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변과 연변사람들의 사는 모습, 그리고 북한에 갈 수 는 없지만, 북한 가까이서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북한 산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을거라는 기대감에, 다른 나라를 여행하기위해 공항을 나갈 때와는 사뭇 다른, 미묘한 감정과 설레임으로 출국수속을 마쳤다.

우리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힘차게 밀치고 만미터상공의 비행안전고도에 진입하기까지 구름을 제치고 솟구쳐 오르는 동안, 항공기는 어느새 서해항로를 따라 북상하고 있었고, 오른쪽 날개 아래로 많은 섬들과 함께 북한땅의 모습도 어렴풋이나마 아른거려서 금번 백두산 탐방의 의미와 호기심을 한층 자극하였다.

비행기는 벌써 960만 키로미터의 광대한 영토와 13억명의 인구를 가진 중국 상공을 날고 있었고, 음료수와 기내식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으나 잠을 잘 시간은 없었다.

잠시 안전에 필요란 안내 방송이 이어졌고 얼마큼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후 우리의 목적지인 장춘공항에 도착한다는 스튜어디스의 멘트가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장춘의 첫 경치는 우리의 시골 모습과 너무 닮아서 국내선 여객기를 탑승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 시간의 시차 탓에 2시에 도착해야 할 비행기가 1시에 도착해서 1시간의 여유를 더 갖게 되었다.

미리 준비된 관광버스에 올라 시내를 통과하며 약간은 생소한 풍경과 모습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장춘은 2만6천여 평방키로미터에 달하는 면적과 750만명의 인구를 가진 길림성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서 옛 만주국의 수도였을 만큼 비교적 큰 지방도시에 속한다 한다. 그러나 장춘공항의 모습은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2. 길림성 그리고 연변조선족 자치주를 배우다

백두산을 가려하는 한국인 이라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며,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길림성’에 대한 사전연구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듣는 ‘연변’의 정확한 지역명칭은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중국에 와서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길림성은 중국의 23개성 중 중급성으로 면적은 한반도 전체에 가까운 19만 평방키로에 달하고, 인구는 2700여만 명으로 중국북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사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 동남부 연변지방(이전 간도지방)에 설립된 중국내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이다. 자치주는 연길, 도문, 돈화 등 5개시와 3개현으로 이루어져있고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조선족은 81만여 명으로 41%를 점하고 있다 고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의 문화를 최대한 인정해주고 조장해주는 정책에 따라 자유롭게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고, 자치주내에서는 의무적으로 한글과 중국어를 병행 표기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한다.
   
 
주도(州都)는 연길시이며 조선말기부터 조선인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이전에는 북간도라 불리웠고, 1952년에 자치구가 설립되었다가 1955년에 자치주로 변경되어 중국내 최대의 조선족 사회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므로, 청산리 항일전승지, 봉오동 항일전승지, 일송정 등 유적지가 많고 교육기관으로는 연변대학, 연변의과학원, 연변사범대학 등이 유명하다.

우리일행을 태운 버스가 3시간을 넘게 달려서 도착한 곳은 길림성 동부 무단강 상류에 위치한 돈화(敦化)였다.

742~755년에 발해국의 국토였다는 돈화 발해광장에는 발해를 세운 제1대 고왕(高王) 대조영으로부터 마지막 왕 대인선까지 열다섯 왕의 모습을 새긴 부조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주말을 맞아 많은 시민들이 가무와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발해국의 융성을 계승하지 못했고 고구려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 못해서 이 광활한 간도(옛 만주)벌판을 우리가 이어받지 못하고, 지금은 남의 나라의 일개 자치주로 살아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이동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휴게소는 우리나라의 국도변 휴게소 수준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한국에서의 수준에 비교 하지말고, 다소 불편해도 중국음식이나 서비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적응하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화장실이용이 불편했고 음식물이 입에 맞지 않아 곤란을 격기도 했다.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도백하(二道白河)로 이동해야 하는데 돈화에서 2시간 이상을 더 버스를 타야 한다. 그리고 장춘에서 이곳 돈화까지도 그러했듯이, 버스 차창너머로 보이는 풍경의 90%는 옥수수 밭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옥수수 밭 농사는 거의 농촌의 주요 작물임에 틀림없었다. 대부분 동물사료로 팔리는 이 옥수수 농사는 땅이 기름지고 심은 후 수확까지 크게 손품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수확까지도 정부기관에서 해 가기 때문에 농촌의 각광받는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 한다.
   
 
이어지는 옥수수 밭을 통과해서 버스는 백두산 북쪽 비탈에 있는 향진급 행정단위 이도백하 마을을 향해 달렸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도 저녁도 아닌 어설픈 식사를 하고 2시간 여를 더 달려 이도백하에 도착했다. 장춘을 출발한지 무려 6~7시간 만이다.

이도백하 마을은 백두산 관광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장거리 버스와 열차를 탈 수 있고 백두산으로 향하는 봉고차와 관광버스를 이용할 수 있어, 백두산 관광의 성수기인 6~9월에는 여행객들로 붐빈다 한다.

이도백하 마을 곳곳은 백두산 관광의 특수 때문에 레져 숙박시설로 보이는 건축물공사와 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아직 손이 가지 못한 오래된 건물들은 개발전의 한산했던 시골풍경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이도백하로 향하는 도로 양편으로 빽빽이 들어선 미인송(美人松)과 자작나무 군락이 열병식을 하는 것처럼 늘어서 있어 이채로웠지만 우리나라의 시골길을 달리는 것만 같은 착각을 종종 느껴야 만 했다.


3. 백두산 북파코스로 오르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트레킹코스는 크게 북파와 서파코스로 나뉘어진다. 동파는 북한 양강도 삼지연에서 백두산 장군봉에 오르는 코스지만 통일 후에나 가능한 코스다.

이도백하의 호텔에서 출발하여 1시간여 동안 이동한 후 북파산문에 도착하여 입장권을 끊고, 다시 셔틀버스로 갈아타야 하며 마지막으로 또 경사도가 심한 상층부에 오르기 위해서는 또 소형차인 봉고차로 갈아타야 천문봉까지 오를 수 있다.

북파산문 광장에는 수많은 관광버스가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한국인들로 보여졌다.
   
 
우리 일행은 북파산문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봉고차 환승지점까지 이동한 후, 먼저 장백폭포를 탐방한 후 내려와 다시 천문봉을 오르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장백폭포로 이동 후, 폭포까지는 소로를 따라 주변의 협곡을 감상하면서 도보로 장백폭포까지 이동하였다.

화면으로만 보던 장백폭포는 그야말로 장엄하였다. 폭포도 폭포려니와 폭포가 있는 계곡 양편은 수직에 가까운 절벽으로 둘려쌓여 있는데, 마치 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만큼 죽 늘어선 각양각색의 절벽들이 신비스럽다 못해 경외감이 들었다.
   
 
그리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활화산 활동과 온천물, 그 온천물에 익힌 찐계란과 인절미 등을 사서 나눠먹고 아쉬움 속에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내려왔다.

장백폭포를 둘러보고 내려와 봉고차로 바꿔타고 천문봉으로 향했다.

옛날에는 4인승 지프차로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고 하는데 지금은 15인승 쯤 되어보이는 봉고차가 꼬불꼬불 S자 길을 따라 백두산 정상 가까운 천문봉주차장까지 오른다.

문명의 이기인 차를 타고 최고봉을 오르는 편안함은 있지만 그 높은 산을 위험한 육로를 따라 과속에 흔들리면서 봉고차로 영산에 올라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의문도 생겼지만, 어쨌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 아닌가.

곡예하듯이 오르내리는 봉고차에 운명을 맡기고 오르면서,해발 2500미터 고도에서 느낄수 있는 운치일랑 생각할 겨를도 없이 20여분 달려 천문봉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우리일행이 탄 차의 차량일련번호가 97번이니 봉고차의 수는 백여대가 훌쩍 넘어 보인다. 그 봉고차들이 하루종일 이길을 쏜살같이 오르내리다 보니, 거의 롤러코스트를 탄 듯한 위험과 스릴을 느껴야 만 했다.

어찌나 차가 흔들렸던지 옆자리의 중극인 여자관광객이 부딪쳐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괜찮다는 표시를 해 주었다.
   
 
4. 백두(白頭)는 어디가고 장백(長白)만 남았느냐

백두산의 어원은 우리말로 흰머리 산 이라는 뜻으로, 산정상에 하얗게 부식토가 쌓여서 백두(白頭)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중국에서 부르는 장백산(長白山)도 길고 흰 산이란 뜻을 담고 있어 의미는 서로 다르지 않다.

백두산의 최고봉은 장군봉으로 2744미터로 기록되어 있으나 북한은 2750미터로 주장하고 있다 한다.백두산의 봉우리는 2500미터 이상 높은 봉우리만도 16개나 되는데 향로봉, 상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저마다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백두산이 1962년에 체결된 북중 국경조약에 따라 북한과 중국영토로 양분되어 천지를 북한에서 54.5%, 중국에서 45.5% 소우하고 있다는 점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전후 참전대가를 요구하는 중국 측의 요청에 북한 측이 동의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어서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그 이유로 인해서 우리의 백두산(白頭山)은 더 이상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백두산이 아니었다.

백두산을 탐방하러 가는 코스도, 이를 관리하는 주체도 모두 중국 관할 하에 있으며, 천지마져 반으로 쪼개져서 넘겨주었으며, 중국은 그 넘겨받은 반쪽을 이용해 멀리서 백두산을 보기위해 찾아온 한국인들로부터 천문학적인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을 탐방하러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인 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서글픈 역사와 현실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백두산은 활화산으로 문헌에 의하면 1597년, 1668년, 1702년에 화산분출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백두산 주변 50키로미터 내외에 진도 2~3의 약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어서 백두산 화산폭발이 임박했다고 경고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내하는 가이드도 은근히 백두산 화산 폭발이 사실이라면 여기에 사는 우리연변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하소연하면서 일각의 걱정을 감추지 않았다.

백두산 화산폭발은 남북한은 물론, 중국 일본 등 관련국들이 머리를 맡대고 연구하고 대책을 수립해 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천지의 면적은 9165명방키로미터, 평균수심 213미터, 최대수심 384미터로 천지의 물이 장백폭포가 되어 이도백하와 송화강으로 흐른다.

칼데라호인 천지는 용암이 분출되어 용암평원을 이루었고 순상화산의 형태를 보여주며 중앙화구는 함몰되어 칼데라가 되었다 한다. 천지의 물은 송화강 이외도 압록강, 두만강의 원류가 되기도 하는 그야말로 지구상의 명산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천지에 이르는 북파코스는 한극인 관광객들로 늘 북적인다. 기내와 호텔, 휴게소, 식당 등 어느 곳을 가도 한국인과 마주치며, 한국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한국관광객 세상이다. 그리고 만나면 어디서 왔느냐 고 서로 물으며 인사를 교환한다.

대개가 지역 친선모임이나 사회단체에서 주선해 온 것으로 보여졌으며, 젊은 이 보다는 연령층이 지긋한 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천문봉주차장에 도착하면, 벌써 천지가 저만큼 보일만큼 9부 이상의 높이에 도달해 있어 천지까지는 걸어서 10여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거리는 물과 200여 미터정도여서, 공제선상에 천지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길게 늘어선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다.

주차장에는 화장실, 선물가계, 추위를 피하기 위한 코트 빌려주는 곳 등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천지에 오르려면 또 한 번의 통제가 기다린다. 관광객이 한꺼번에 오르다 보면 위험하기 때문에 100여명씩 끊어서 울려 보낸다. 꼬불꼬불 울퉁불퉁한 길을 사진 찍으며 요리저리 지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백두산에 올라왔다 는 인증 사진이 필요하고 같이 간 사람을 놓치지 않아야 하니 백두산 정상 천지길은 장속 같았다.

또한 사진 찍기 좋은 장소는 중국인 사진사들이 장악하고 돈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고 있어서 혼잡은 더욱 심했고 멎진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가 자칫 천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매우 위험하기까지 했다.

백두산까지 간다 해도 천지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천지를 볼수 있는 확율은 20%에 불과하다. “백 번와서 두 번 볼 수 있어 백두산이라 한다” 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언제 급변할지 모르는 기상 때문에 천지까지 올라와서 안개에 쌓인 광경만 보고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가기 십상이라 한다.

우리 일행은 하늘의 선택을 입었을까? 우리가 간 날은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천지는 밝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천지는 장엄하고 성스러운 모습으로 보였지만, 차분히 천지를 감상할 여유는 별로 없었다.
   
 
사진찍을랴, 일행 놓칠라, 구경할라,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랴 정신없었다. 편안한 등정은 결코 될 수 없다.
   
 
천지의 물에 손을 담가 보겠다던 생각, 어떤 시상이라도 떠오르면 시라도 한편 써 보겠다는 생각은 사치였다.

불과 1시간여 만에 떠밀리다시피 천지를 내려오는데, 어디선지 벌써 검은 구름이 물려오고 있었다. 늦게 올라온 관광객들이 제대로 구경을 못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더러는 중국인들도 눈에 띄었으나 노인이나 거동이 불편해 보인 사람까지 대동하여 생전에 소원을 풀어주려는 듯 한 관광객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왜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우리 산 백두산을 찾는데 우리 땅을 밟고 오지 못하고, 남의 땅을 돌아서 중국인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와야 만하는 가, 북한은 백두산 관광의 길을 왜 열지 못하고 먼발치서 이와 같은 기괴한 모습을 지켜보고 만 있어야 하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멀리 백두산 아래를 바라보는 절경의 시야를 가로 막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어서 통일이 되어야지”, “아니 통일 이전이라도 어서 백두산과 금강산 관광길이 터져야지, 이런 비극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한단 말인가?”이런 의문을 던지는 사이에 우리 일행은 벌서 백두산을 내려오고 있었고, 무사히 백두산을 구경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탐방할 수밖에 없었다는 불편함이 교차되어 조금은 착잡한 감정을 피할 수 없었다.
   
 
5. 독립운동의 요람 용정, 그리고 연길로

백두산에서 내려온 우리 일행은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이도백하 마을까지 내려와 늦은 점심을 해결한 다음,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발길을 돌려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인 용정으로 향했다.

혜란강을 가로지르는 용문교를 지나 용정시내로 들어오면 건물도, 주택도, 거리의 간판도 우리나라의 시골마을이 연상되는 풍경이었다. 용정이라는 명칭은 우리 선조들이 간도(만주)로 이주하면서 처음으로 개척한 땅인데, 이때 우물이 발견되어 용정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혜란강이 흐르는 들판너머로 비암산 봉우리의 일송정을 바라보면서 우리일행은 ‘선구자’ 노래를 합창하였다.

이 광활한 땅에서 민족의 꿋꿋한 기상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동포들에게 연민의 정이 한층 깊어졌다.

여기가 옛 간도(만주)였다니, 아직도 그 역사를 잊지 못해 간도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국내 인사들의 의지와 노력에 존경심이 느껴진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사과배(사과와 배를 접목해서 얻은 과일)는 명물이어서 외부로 많이 팔려나가고 있다 한다. 이 곳 뿐만 아니라 길림성의 땅이 비옥해서 이곳에서 재배되는 채소나 과일이 중국내에서도 많은 호평을 받고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음을 주고 있다 한다.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들은 발전하는 한국의 위상과 중국내에 불고 있는 한류의 영향을 받아 위상도 강화되고 자존심도 많이 높아지고 있다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어, 발전하는 조국의 위상이 해외 동포들에게도 이토록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 자긍심과 함께 일말의 책임감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족 일부는 한국에 들어와서 여러 직장에서 열심히 활동해서 돈을 벌어 귀국하면 조선족사회에서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6. 도문 국경지대에서 북한 땅을 보다

연길시내를 둘러보고 호텔에서 1박한 후 우리일정의 마지막 일정인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와 두만강을 탐방하기 위해 도문으로 향했다.

도문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동남부 도문강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쪽으로는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과 접하고 있는 국경도시다. 도문강 곳곳에 붉은 글씨로 한굴과 중국어로 된 국경표시 간판을 볼 수 있었다.
   
 
인구 13만명 중 57%인 78000 명이 조선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다.

중국 쪽에서는 도문강으로 부르지만 우리가 이르는 이름은 두만강이다. 두만강은 철교와 일반다리가 있고, 한국관광객을 위해 관광선이 강을 따라 500여 미터를 분주하게 오르내리지만, 두만강은 더 이상 푸른 물이 아니다.

북한쪽의 광산공사로 인해 황토빛 물줄기가 우리나라의 작은 샛강을 연상하리 만큼 넓지도 깊지도 않은 작은 강이다. 수영을 별로 잘하지 못하는 필자의 수영실력으로도 금방 건널 수 있을 것 같이 작게 보이는 강이다.

보초를 서고 있는 북한병사의 모습이 간간히 눈에 띠고 발가벗은 산등성이 아래로 허름한 건물 몇채가 보일 뿐 조용하고 한적해서, 두 나라의 국경지대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이 작은 강 하나가 국경을 가르는 것 까지는 좋은데, 지척의 강 너머로 우리 땅 우리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왜 분열과 갈등을 격고 있는지, 왜 우리는 이토록 중국 땅을 돌아서 두만강을 보러 와야 하는지...., 똑같은 의문이 계속 제기되었다.

총을 맨 북한병사 한 명이 보일 듯 말 듯 수풀사이를 넘나들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누구를?, 왜 지키는 것일까?, 분명 탈북자를 감시하는 임무도 주요 임무증 하나 일 것이다.

저 보초병은 무엇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이토록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알아서 무엇하랴,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관광객과 북한 보초병의 시각의 차이를 역사는 어찌 설명해 줄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시각차이로 인한 비극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진정 묻지 않을 수 없었음은 필자의 덧없는 감상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7. 탐방 성과와 회한

민족의 영산 백두산 탐방의 성과는 가히 헤아릴 수 없을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백두산에 가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지금은 여행도 편리해 지고 여행비도 저렴해져서 많은 한국인들이 찾고 있고, 기간도 길지 않아서 맘만 먹으면 제주도 가는 셈 치고 다녀올 수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백두산은 우리가 부르고 기대하던 백두산과 사뭇 달랐다. 한국전쟁 후 1962년에 체결된 북중 국경조약에 따라 백두산은 천지를 필두로 반분되어 있었고, 그 반분된 한쪽의 이름은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백두산이 달라졌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작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일본의 식민지배는 물론 6.25 한국전쟁의 후유증이 이렇게 크게 나타날 줄은 몰랐었다.

우리민족의 조상들이 만주 벌판을 호령했고 두만강을 건너가 땅을 개척해서 이를 간도라 불렀던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 이제는 우리의 백두산은 반분되어 중국 땅이 된지 오래며, 그 중국 땅을 돌아서 백두산을 탐방해야 하는 현실이 기가 막히고 서글프다.

부대 다음번 백두산 방문길은 우리의 땅을 밟아서 우리의 산하를 통해서 천지에 이르는 탐방길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 반쪽이나마 북한이 통로를 굳게 잠궈놓고 역사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문화적으로 공유해야 할 민족의 자산을 개방하지 않고 있음은 수치스럽고 한심스런 일이다.

그러고도 개방을 말하고, 문화를 말하고, 통일을 이야기 하는가?, 북한은 자국경제에 크게 도음이 되는 백두산과 금강산 관광의 문을 빨리 열어 야 할 것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무엇 때문에 중국을 통해서 백두산을 올라가며 중국에 돈을 써야 하는가, 과연 통일의 의지는 있는건가, 금강산 관광객을 조준 살해하는 만행을 방지할 수 있는 조치하나 취하지 못하는 북한 당국은 속히 관광객의 신변안전보장을 책임질 수 있는 조치를 먼저 취해야 할 것이다.

민간 사회단체가 풍선에 매달아 띄우는 삐라가 북한 군사정권에 꽤나 부담이 되는가 보다. 연일 비난과 협박을 일삼고 있는데, 북한은 과연 주권이 있는 국가인가,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며, 그렇게 인민의 눈과 귀를 막고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다 고 생각하는가,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통일전의 서독과 동독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남과 북도 어서 속히 문화와 교류의 물꼬를 터야 할 것이다. 이념과 사상을 넘어서 서로 이익이 되면서 체제유지와 무관한 것부터 하나 하나 시작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이 생기고 신뢰가 쌓이면 오해도, 불신도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중국에 대한 이해도를 드높일 수 있었다. 중국을 처음 방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느 때 못지않게 세계 최대의 인구와 광대한 영토를 가진 중국, 중국인들도 죽기전까지 중국 땅을 다 밟아보지 못한다는 애기처럼, 넓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소유한 중국에 대해 부분적으로 나마 깊은 속내를 돌아 볼 수 있어서 많은 도음이 되었다.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공공목적으로 필요한 시기에는 언제고 국가에 땅을 내 놓아야 하는 사회주의적 제도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넓은 땅, 그래서 4~6시간 정도의 이동거리는 별로 먼 거리로 치지 않는다는 느긋함과 여유 속에서, 우리의 조급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해도를 넓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으나, 그간 너무도 아는 게 적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대한 보다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해 보인다.

그들도 우리와 한 피를 나눈 형제자매가 아닌가?. 그들도 우리나라의 통일을 향한 소중한 자원이 될 수 있고, 또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제도권 범위 내에서 따뜻하게 보살피는 아량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이번 탐방을 계기로, 백두산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목표를 달성했고, 아울러 우리나라 최북단 두만강 물을 직접 만져보고 함경북도 온성군의 북한 땅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자나 깨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박근혜대통령은 지난 2014년 9월24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한은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경제발전과 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변화의 길로 나와야 한다.”며 북한의 변화와 개방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같은 언어, 문화, 역사를 공유라는 남과 북이 유엔에서 2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북한으로 하여금 교류와 개방의 길로 나와 줄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우리는 힘을 합해서 금강산으로, 백두산으로, 그리고 통일 한국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통일은 다른 나라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서로 단결하고 마음을 합해서 상대를 끈기 있게 설득하고 국제사회와 협력해서 전방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먼 중국땅에서 우리 땅이 아닌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민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는 조선족은 물론, 수많은 해외 동포들에게도 희망과 통일의 기쁨을 나눠주는 날이 어서 속히 도래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끝으로 이번 백두산 탐방을 함께 해준 일행 모두가 건강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성공적으로 마감할 수 있도록 협주해 주신 일행 여러분들과 관계관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이번 기회에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자라나는 세대들과 내 고장, 내 가족, 우리지역 주민들과 나누고 싶고, 향후 백두산 탐방을 계획하는 분들에게도 조금이나마 참고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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