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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탐방기]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적 발자취… 블라디보스톡
가평저널  |  gpjn20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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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3  1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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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중순부터 가평군에서 촬영 제작될 영화 ‘혼’ 을 이해 하기위해서 항일 정신이 활화산처럼 불탔던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들러보아야 했다.

우리 조상들이 흔히 일컬었던 지명인 러시아의 연해주는 ‘프리모르스키 지구(Primorsky Kray)’를 말한다.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라는 뜻으로 연해주(沿海州)의 한자 풀이와 같다.

연해주는 러시아 연방 극동지방의 지구들 가운데 가장 작다. 이 지구의 행정중심도시가 바로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이다. 블라디보스톡은 매서운 날씨의 러시아에서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不凍港)’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러시아 함대의 주요 군사적 요충지다.

블라디보스톡을 포함한 연해주 일대는 원래 중국 땅이다. 1856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톈진과 베이징을 공격, 점령한 ‘제2차 아편 전쟁’ 직후 청나라와 영국·프랑스의 조약을 알선한 대가로 러시아는 우수리 강 동쪽의 연해주를 영토로 얻게 됐다.

1800년대의 조선은 국정이 매우 혼란했고, 소수의 양반들이 대다수의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다. 농사지을 땅이 없는 가난한 농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와 연해주로 많이 이주했다.

연해주에는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이주하면서 우리 민족(고려인)의 이주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떠난 고려인들도 상당수다.

연해주에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블라디보스톡에는 1870년대부터 고려인이 많이 모이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톡 시내 주택단지 인근에는 과거 한인촌을 기리는 ‘신한촌기념비(新韓村 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1999년 8월 15일,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곳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신한촌기념비는 3개의 큰 기둥과 8개의 작은 돌로 이뤄져 있다. ‘연해주신한촌기념탑문’이라고 적힌 기념비에는 ‘민족의 최고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정신이며, 첨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

추운 날씨 탓이 아니라 선조들의 고생을 어렴풋이 전해 들었던 터라 콧등이 더욱 시리고 눈시울이 불거졌다. 비석에 적힌 문구를 읽을 때마다 정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고려인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다시 피땀을 흘려 신개척리를 건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의미로 ‘신한촌(新韓村)’이라는 마을을 만들었다. 신한촌은 일제 치하 독립운동이 아주 왕성하게 이뤄졌던 역사적인 장소다. 항일 민족지사들의 집결지였고, 국외독립운동의 중추기지로 발전했다.

여행사 가이드에 따르면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일대로 강제 이주된 블라디보스톡의 고려인은 18만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록은 17만2천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블라디보스톡 전체 인구의 30% 수준이라고 한다. 일본 첩자를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고려인 강제이주의 수단은 그야 말로 ‘생지옥행 열차’였다.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힘들게 마련한 집과 재산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난방도 되지 않는 화물열차에서 길게는 1개월 이상을 머물러야 했다.

부실한 식사는 물론 식수가 부족하고, 불결한 위생상태로 인해 몸이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면서 열차에서 죽어간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가이드는 노약자의 사망자가 많았는데, 기록에 적힌 554명이 아닌 4만명에 달한다고 전한다. 2차대전 때 자행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연상될 정도로 스탈린의 잔인한 만행이다.

   
 
26일 찾은 ‘신한촌기념비(新韓村 記念碑)’ 옆 작은 공간의 사료 전시실에는 블라디보스톡 한인회장인 리바체 슬라브(63)씨가 일행을 반겼다.

뇌경색으로 언어 구사가 어렵고, 거동이 불편한 그는 손짓으로 사진 앨범 속의 안중근 의사를 가리키면서 “똑같아”라는 한국말을 반복한다. 실제로 콧수염을 기른 리바체 슬라브씨는 언뜻 안중근 의사와 흡사하게 보였다.

리바체 슬라브 러시아인들이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지나는 공간인 ‘신한촌기념비’에 매일 방문해 숙연한 자세로 선조들을 기린다고 한다. 물론 청소를 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신한촌기념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러시아에서 많은 돈을 벌어 재산의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은 최재형(崔在亨) 선생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최재형 선생은 1858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머슴과 기생의 사이에서 노비로 태어났으며, 집을 나와 전전하다가 러시아 선장을 만난 뒤 그 부부의 도움으로 러시아 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군인들과의 친분을 내세워 군수산업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 앞서 블라디보스톡에서 최재형 선생을 만났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를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느껴 안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했다. 안 의사의 총도 최재형 선생의 독립자금으로 구입했을 것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최재형 선생은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해 연해주, 러시아 곳곳에서 힘들게 생활했던 고려인들에게 큰 힘이 됐던 인물이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집집마다 최재형 선생 사진을 걸어놓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연해주 한인들은 독립운동과 후손 교육에 힘썼던 최재형(崔在亨) 선생에게 ‘최 페치카(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라는 애칭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최재형 선생은 현재의 군수 격인 도헌(都憲)을 맡아 행정을 통해 동포들을 챙기는 한편 곳곳에 한인중학교 등 많은 한인학교를 지어 고려인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또 언론사를 만들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도 전개했다.

1910년 2월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인수해 ‘대동공보(大東共報’로 개칭 변호사인 미하일로프를 주필로 앉히고, 재간행해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대동공보’는 자주독립정신과 국권회복을 고취시키는 논설과 기사를 수시로 게재했다. 러시아와 조선 본토는 물론 세계 각국에 거류하는 우리 동포들에게도 커다란 감명과 영향을 주었다.

신문을 발행하는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는 연해주지방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본에게는 최재형 선생은 눈에 가시였다. 일제의 주요 감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4월 5일 새벽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세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우수리스크로 난입한 일본군에게 체포돼 죽임을 당했다.

조선시대 말 힘없고 가난했던 조국은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하지만 연해주 고려인들을 척박한 땅에서 열심히 생활하면서 힘들게 모은 돈을 독립자금으로 쾌척했다. 조국은 그들을 돕지 못했지만, 그들은 꺼져가는 조국을 위해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제라도 국가는 국가를 지키고 살려내려 애썼던 독립투사들의 혼이라도 달랠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하지 않을까?

러일전쟁 취재차 대한민국에 파견된 영국 유수의 언론사 런던데일리 크리니클의 특파원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 일본인들의 야만적이고 사악한 행위들을 보다 못해 양기탁과 신채호, 박은식, 김구, 안창호 등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국내는 물론 전세계의 일본만행 을 고발 송고하는 위험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만주와 시베리아등으로 끌려 다니며 모진고문을 당하고 한성 경무국으로 다시 끌려와 풀려났지만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 유골을 지금의 양화대교 강변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된 것이다.

독립운동의 역사적 사실의 촬영지로 가평군으로의 유치는 나의 불타는
애국심의 열정으로 시작된 것이다.

장태령 영화감독과의 인연으로 왜정시대의 잔혹한 민족사를 가평군에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것도 가평군의 영광이 아닌가싶다.

가평군의 돈키호테 전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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