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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학도(晩學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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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30  16: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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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청 기획감사실장 이우인
학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을때면 나는 의례히 동료들로부터 OK(5K)로 통한다. 내 별명이 OK(5K)가 된 것은 K초등학교, K중학교, K고등학교, K대학교, K대 대학원 등 내가 다닌 학교의 이니셜이 모두 K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내가 속한 사회과학 교수들의 모임에서도 내 별명이 OK로 불리는것은 그들이 무엇을 주문하든 나는 늘 ‘오케이! 오케이!’ 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공직에 입문했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 할 기회가 없었다. 그 시절에도 학력과 학연은 매우 중요시되는 사회였다. 그래서 고졸의 학력은 무언가 부족하고 항상 묵직하게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행정주사보 시절 고민 끝에 만학을 결심하게 된다. 마침내 1988년 예비고사를 치루고 춘천전문대학(한림성심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직장 분위기를 살피며 동료 눈치를 보아가며 매일 주경야독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청춘의 나이는 지났지만 만학도로서 행정학 공부를 시작하여 새로운 지식을 통해 비로소 나는 카알라일의 이른바‘새로운 하늘과 땅’을 보았고 그래서 더욱더 희망 찬 미래를 꿈꾸며 학업에 정진 할 수 있었다.

정치행정일원론, 정치행정이원론 등은 내 직장의 이야기를 학문으로 풀어 쓴 것 같아서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러면서 나의 지적 목마름은 서서히 해갈되어갔다.

학교 다닐때 에피소드 몇 개를 소개해 본다. 야간 등하교길 비가 오나 바람 부나 경춘국도 옛길을 구닥다리 포니승용차로 달려본 기분은 어떠했을까? 물론 학교가기가 싫었던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덕두원 강모퉁이에 포니차를 세워놓고 흐르는 강물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캔맥주를 마시며 심야 라디오 프로인 “별이 빛나는 밤에”의 음악을 듣다가 수업을 통째로 빼먹고 귀가하는 날도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여름방학, 겨울방학, 동아리MT 등 시간들은 빨리 지나갔다.

하루하루가 유수와 같았다. 그러던 중 내가 학문의 멘토로 더 나아가 내 인생의 멘토로서 법학전공 이석원 교수를 만난 것은 하나의 행운이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형님처럼 수업이 끝난 후 늦은 밤 출출할 때면 포장마차에 들러 만학주를 나누며 학문과 인생을 논했던 시간들이 강의 시간보다 더 유익해었다. 마침내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 한국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에 편입하여 만학의 길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최화식 교수와 윤중기 원사를 학우로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그 당시 어려운 직장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학업에 정진했던 동지들이다.

어찌 보면 지식을 얻기 위한 학문보다는 주변사람들의 삶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것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유익한 가치가 아니었던가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이들 만학도들은 매슬로우(Maslow)의 인간욕구 5단계론의 마지막 단계인 학문(배움)을 통해 자아실현을 꿈꾸고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 또한 이런 만학도들이 없었더라면 방통대 졸업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 당시 방송통신대학 졸업률이 2%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방송통신대학 과정은 무척 어려웠는 데 그것은 방송만으로 독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학도인 나는 한국방송통신대학 졸업을 통해 커다란 보람과 성취감을 느꼈다.

1년 후 나는 다시 경희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가평에서 서울까지 먼 길을 통학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 수업을 위해 등교하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는 경희대 대학원을 중도에 포기하고 그 다음해 강원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하고 좀더 심도있는 행정학을 연구하게 된다. 자랑은 아니지만 열정을 다해 학업에 정진하였기에 올 에이플러스 학점을 기록했다.

2001년 「지방의회의 지역발전 기여도에 대한 실증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다음해 지도교수였던 권희재 교수의 권유로 강원대 일반행정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2002년 3월부터 한림성심대학에서 7년간 공직과 교수직을 겸하는 겸임교수로 임명되어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교육의 이념적 가치가 홍익인간이라 하지 않았는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 나는 대학 강단에 섰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적성에도 맞았고 재미도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속에서 때로는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때면 삶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강의는 2개 과목으로 주당 9시간 이상을 소화해야 했는데 강의 준비를 위해 그 어느 때 보다 새로운 공부를 해야 했다.

강의 품격과 수준을 높이려고 1주일에 2권 이상 베스트셀러를 읽었으며 딱딱하고 지루한 강의를 좀더 부드럽고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내가 읽었던 인문학 책 제목들을 칠판 한쪽 구석에 써 놓고 책을 읽어보라며 책장사 아닌 책장사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그 시절의 장면 장면이 파노라마되어 생생하게 스쳐 지나간다. 만학을 할 때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은 역시 내 아내다.

아내의 내조없이 직장생활과 겸임교수를 하기란 불가능 했을 것이다.아내는 아들 창기, 딸 지현이를 돌보며 직장생활을 하였기에 무척 힘들어 했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하는 일을 존중해주고 항상 격려해 주었다. 지금도 나는 아내를 생각할 때면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공존한다.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도 아내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황금기에 부(富)를 축적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한다지만 나는 지식을 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지금도 후회는 없다. 그러나 과연 나는 얻고자 하는 지식을 구했을까? 물론 학문의 길은 끝이 없다. 어느 때는 부족한 지식을 가지고 강의를 하다보면 실력의 한계에 봉착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쨌든 7년 동안 투잡을 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학문을 통해 모르는 것을 배우니 행복했고 학생들을 가르치니 보람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지혜가 생겼다.나는 이렇게이야기한다. 만학(晩學)은 마음을 좀 더 여유롭고 넓게 만들어 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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